《An Ongoing Novel : 계속되는 소설》




2026. 04. 01 - 04. 30


두고 온 것들—과거에, 회화에, 회화의 깊숙한 곳에

 

콘노 유키

 

 

 

이승주의 개인전 《계속되는 소설》(갤러리헤세드)에서 출품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붙잡히지 않는>이라는 제목과 <욥>이라는 제목의 회화가 여러 점 소개된다. <붙잡히지 않는>에서 우리는 야외 풍경, 예컨대 꽃과 나무, 풀밭을 볼 수 있고, <욥>에서는 수납장과 부엌, 식기류가 있는 실내 공간을 볼 수 있다. 야외와 실내를 오가는 이승주의 시선을 통해서, 관객은 무엇을 느낄 수 있을까. 바람에 나부끼는 들꽃, 커튼에 가려진 채 희미하게 보이는 풍경, 수납장에 담긴 옷이 풍기는 사사로움의 향기. 우리는 야외와 실내에 보낸 작가의 시선을 따라간다. 유일하게 손이 등장하는 출품작 <붙잡히지 않는 (#8)>(2025)을 봐도, 우리는 거기에 부재를 느낄 수 있다. 손에 든 들꽃도 지금은 어디에 있을까—이제는 여기에 없는 것, 지금과 단절된 과거에 머무는 것처럼 아련하게 보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단절은 화면을 덮은 풀밭이나 빛이 반사하지 않은 식기류, 깔끔하고 깨끗한 테이블 등의 표현을 통해 강화한다. 

 

이승주의 회화는 쓸쓸하거나 아련함에 그칠까? 그의 고요한 화면은 오히려 우리를 회화에서 단절시키는 대신, 그보다 깊은 곳으로 이끈다. 자연을 그릴 때, 그는 꽃 자체를 그린다기보다는 풀이 무성한 모습을 그린다. <붙잡히지 않는 (#1)>(2024)이나 <붙잡히지 않는 (#9)>와 <붙잡히지 않는 (#10)>(2025)의 두 점에서 꽃은 하늘을 나는 기러기 떼처럼 화면에서 뭉쳤다가 흩어진다. 이 움직임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작용하는 힘이 있음을 보여준다. 실내 풍경 또한 마찬가지다. <욥 (#19)>(2026)에서 사사로움은 전적으로 드러나지 않고 수납장 속에 보호받듯이 들어가 있다. 하지만 수납장의 직각을 깨는 의류들, <욥 (#20)>(2026)의 주름진 침대 시트나 <욥 (#14)>(2025)의 살랑이는 커튼의 묘사들은 차단된 곳 너머에 있는 초월적인 힘을 슬쩍 암시하며, 화면의 정적을 잠시 깨운다. 

 

여기, 창백해 보이는 화면을 보면, 우리는 생기나 열기가 빠졌거나 날아가 버렸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한때 있던 열기와 생기는 지금 어디에 있는 것일까. 어딘가에 있긴 하다면 이 창백함 이면에, 그리고 과거라는 지나간 시점에 있지 않을까. 이승주가 느낀—그러나 회화에 오롯이 담아내지 못한—생기와 열기는 물러선 배후에, 과거에 두고 왔다고 할 수 있다. 이 열기는 순간적으로 다시, 화면에 잔향처럼 아련하게 달라붙는다. 이승주의 작업에서 두고 옴이란, 어떤 순간을 과거나 기억 속 어딘가에 두고 오는 동시에, 회화라는 형식에 두고 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는 그때의 그 감정을 과거에 두고 왔고, 화면보다 더 깊은 곳에 두고 왔다. 생기와 열기는 표면에 노출되는 대신, 안쪽에서 맴돌며 이쪽을 향해 바라본다. 과거, 저편, 소멸의 저편에서 이쪽을 보는 시선은 창백함에 은은한 감각을 아로새긴다. 두고 왔을 뿐, 그 자체로 있지 않을 뿐, 여기에 있다. 작은 신호들, 여리고 미세한 신호들은 내밀함의 상태에서 잠시 깨어나, 이쪽을 다시 바라본다. 이쪽에는 붓을 든 화가가 있었고, 회화를 보는 사람이 있다. 작가 노트에서 이승주가 거듭 언급하는 ‘믿음’이란 이토록 내적이고 고요한, 창백한 화면이 온전히 그 내부를 드러내지 않은 채 우리와 마주하는 ‘그’ 순간, 즉 초월적인 만남을 향한 태도라 할 수 있다. 

 

거실에—거기에 사람이 있을까 하면,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잘 보이지 않을 뿐, 여기에 있다. 풀밭을 지나, 집에서 시간을 보내, 오늘을 산다. 오늘의 살아 있음 밑에는 수많은 지나감이 포개어져 있다. 그 지나감의 층은 결코 웅변하거나 수다스럽지 않다. 우리가 지금 서 있는 바닥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시간들이 쌓여 있는 것처럼, 이승주의 회화는 부재하지 않는 동시에 부재하는 모습을 담는다. 두고 온 것들—과거에, 회화에, 회화의 깊숙한 곳에—을 재회한다는 믿음이 사람과 회화 사이에 탄생한다. 아련함이 강조되는 화면은 물러선 그 위치에 사람을 있게 한다. 여기서 사람이란 회화를 보는 사람은 물론, 이승주라는 한 사람이기도 한다. 전적으로 정적인 화면은, 그 물러선 위치에 사람의 열망을 담는다. 열망은 폭발하는 듯한 감정을 즉각적으로 드러낸 결과가 아닌, 거기에 다가갈 수 없거나 끝끝내 손에 잡을 수 없는 채 흩어지는 찰나 앞에서 추동되는 갈망을 의미한다. 지나감이라는 끝을 알지만, 그 끝의 끝(end of the edge)에서 다가가 대면과 접촉을 원하는 자의 시선이, 여기, 이승주의 회화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