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canny Calm : 이상한 고요




2026. 08. 04 - 08. 25


《이상異常/理想한 고요》

 

 



이미지는 두 가지 경로로 화면에 도착한다. 하나는 안에서 밖으로, 이것은 개인의 기억과 무의식이 형상을 빌려 표면에 맺히는 경로다. 다른 하나는 밖에서 안으로, 이미 세상에 유통되고 있던 이미지가 한 사람의 일상에 내려앉는 경로다. 이번 전시는 이 두 경로를 각기 다른 방식으로 밀고 나가는 두 작가, 조성민과 박종화를 한 공간에 세운다.


조성민의 화면은 서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홀로 벌판을 걷는 인물,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인물, 거실을 가로지르는 공작새나 붕 뜬 농구공처럼 논리적 인과 없이 화면에 끼어드는 사물들은 20세기 초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회화가 텅 빈 광장에 심어둔 '설명되지 않는 사물'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데 키리코의 사물이 건축적 공허 속에서 낯섦을 만들어냈다면, 조성민의 사물은 저채도의 실내와 밤 풍경이라는 지극히 사적인 공간 속에서 낯섦을 만들어낸다. 이는 초현실주의가 즐겨 쓴 데페이즈망(dépaysement, 사물을 원래 자리에서 이탈시키는 기법)을 개인의 기억 서랍 안으로 옮겨온 작업과 맞닿아 보인다. 그림 속에 다시 그림이 놓이는 〈Donde Voy〉의 구조는 이 화면들이 재현하는 것이 풍경이 아니라 풍경에 대한 기억, 혹은 기억에 대한 기억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드러낸다.


박종화는 반대 방향에서 같은 질문에 접근한다. 그의 화면에서 반복되는 것은 특정한 이미지 한 장이 아니라, 이미 한 시대를 대표했던 회화의 배경 그 자체다. 담배를 물고 나무 상자에 걸터앉은 청년 뒤로 놓인 분홍빛 아케이드와 인공적인 그림자는 조르조 데 키리코의 형이상회화 무대 장치를 거의 그대로 세운 것이고, 궁정화·종교화풍으로 그려진 군중 앞에는 럭키리브레 선수가 태연히 서 있으며, 붐비는 식당 한구석에는 19세기 복장을 한 인물이 아무 설명 없이 걸어 나간다. 대중 상업 이미지를 그대로 가져와 예술의 언어로 삼았던 워홀 자신의 작업 방식이 응축된 바나나(1967년 벨벳 언더그라운드 앨범 커버로 대중에 각인된 이미지)와, 호쿠사이의 〈가나가와 해변의 높은 파도 아래〉(1831, 자포니슴을 거쳐 반 고흐와 드뷔시에게까지 흔적을 남긴 이미지)를 신체와 도시 풍경 위에 얹는 작업도 같은 논리의 연장선에 있다. 박종화가 인용하는 것은 이미지 한 장이 아니라 그 이미지가 속했던 회화의 시대 전체이며, 그 위에 아무런 동요 없이 오늘의 인물을 세운다. 이는 케힌데 와일리가 옛 초상화·역사화의 구도를 빌려와 그 자리에 동시대 인물을 세운 태도와 겹치고, 셰리 레빈과 리처드 프린스 이후 전유미술이 다뤄온 원본성과 소유권의 질문과도 맞닿아 있다. 다만 그 질문은 미술사 내부에 머물지 않고, 이미지가 밈(meme)처럼 개인의 신체와 배경에 들러붙어 유통되는 오늘의 이미지 소비 방식으로까지 확장된다.


흥미롭게도 두 작가는 조르조 데 키리코라는 같은 원점에서 서로 다른 방향으로 걸어 나간다. 조성민에게 데 키리코는 설명되지 않는 사물을 사적인 실내로 데려오는 태도이고, 박종화에게 데 키리코는 무대 자체를 그대로 인용해 그 위에 오늘의 인물을 세우는 태도다. 두 작가를 나란히 세우면 결국 하나의 질문이 남는다. 우리가 지니고 다니는 이미지는 어디서 오는가. 조성민에게 그것은 설명할 수 없는 사적 도상(圖像)이고, 박종화에게 그것은 이미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공적 도상이다. 이 전시는 두 이미지 체계 중 어느 쪽이 더 진실하다고 판정하지 않는다. 대신 두 화면이 공통적으로 택한 태도 — 무언가 자기 몸집보다 크고 이질적인 것을 곁에 둔 채로도 침착함을 잃지 않는 인물의 자세 — 를 이 전시의 유일한 논리로 삼는다. 《이상한 고요》라는 제목은 이 침착함, 즉 정상성에서 벗어난 것(異常)과 이상적인 정적(理想) 사이의 좁은 간격을 가리킨다.


관람객에게 남는 것은 감상이 아니라 위치의 문제다. 이 전시를 보고 나면, 자신이 지금 지니고 걷는 이미지가 기억에서 온 것인지 세상으로부터 빌려온 것인지를 한 번쯤 되짚게 될 것이다.